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이브러햄 링컨 (문단 편집) == 링컨과 노예제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865_Abraham_Lincoln_O-103c.jpg|width=190]] || || 말년의 링컨('''1865년''')[* '''암살당하기 몇 달 전'''의 사진이다.] || 흔히 음해하는 내용으로는, '에이브러햄 링컨은 노예제의 존폐에 대해 크게 상관하지 않았고, 남부를 착취하다시피하는 북부의 경제 블록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전쟁을 벌였다.'라는 식의 내용들이 많이 퍼져있고, 대표적인 예로는 이원복 교수의 교양만화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편 2~3탄이 있다. 이는 사이비 역사 이론인 [[https://ko.wikipedia.org/wiki/%EC%9E%83%EC%96%B4%EB%B2%84%EB%A6%B0_%EB%8C%80%EC%9D%98|잃어버린 대의(Lost Cause)]]의 일환으로, 전쟁과 북부의 중심축이었던 링컨의 목적이었던 노예제 폐지가 그 뒤에는 음모론적인 경제/정치적 뒷배경이 깔려있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링컨은 [[노예제]] 폐지라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북아메리카에서 노예제란 비도덕적 제도를 추방한단 목적에 자신의 정치생명을 모두 바쳤다'''. 그리고 [[미합중국 헌법]] 제13조를 통과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사실 링컨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은 후술되어있듯 그가 지역의 유불리에 따라서 상반된 발언을 했다는 점이나, 연방을 위해 노예제를 반대할 수도, 찬성할 수도 있다고 말한 것을 예로 들며 링컨이 노예제 문제는 뒷전으로 두고 [[아메리카 연합국|남부 주들의 연방 탈퇴]]를 막는데만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보자면 링컨의 최대 관심사는 연방의 유지와 노예제 폐지 '''둘 다'''였다. 사실 링컨은 급진파라기보다는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현실 정치인이었고[* 물론, 그가 보수주의자였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오히려 온건 성향이었을 지언정, 확고한 진보주의자였으며, 아예 당시 그가 속해있던 [[공화당(미국)|공화당]]은 20세기 초까지는 분명한 '''진보정당'''이었고, 되레 당시의 [[민주당(미국)|민주당]]이 '''보수정당'''이었다. 남북전쟁에서 북부가 승리한 후 자본주의의 성장이라는 사회의 변화에 따라 진보와 보수의 기준이 변화한 것. 멀리 갈 것도 없이 연방주의만 놓고 봐도, 링컨이 고수한 친연방주의자들은 작금의 민주당에 많으며 반대는 공화당에 많다. 이런 성향이 서로 역전된 것은 민주당의 진보화와 함께 공화당의 소위 남부 전략이 먹힌 20세기 이후부터. 링컨이 딱히 인종/정파 가리지 않고 존경받는 이유 중 하나이자, 반대로 소수긴 하지만 좌우 안티들이 있는 이유 중엔 이런 이념 성향이나 정치적 계보 탓도 있을 듯.] 그러다 보니 당선을 위해 아래 발언들처럼 (물론 추측의 영역이긴 하지만) 본심을 교묘히 숨긴 측면도 있어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볼 경우 링컨이 [[포퓰리즘|포퓰리스트]]적 측면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과감한 개혁을 시행하기 위해선 우선 권력을 쟁취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노련한 정치인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이 사람 저 사람이니, 이 인종 저 인종이니, 다른 인종은 열등하므로 열등한 위치에 놓여야 한다는 등의 이 모든 궤변은 이제 버립시다. 이 모든 걸 버리고 이 땅 전역에서 한 국민으로 단결해 다시 한 번 일어서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선언'''합시다. >---- >1858년 7월 일리노이 주 북부(시카고) [[http://teachingamericanhistory.org/library/document/speech-at-chicago-illinois/|영어전문]]. 링컨의 이런 태도는 링컨의 [[존 C. 프리몬트]]의 노예해방선언문의 반응에서도 드러난다. 자세한 내용은 [[존 C. 프리몬트|해당 문서]] 참조. 미군 육군 서부 방면군 소장이자 [[공화당 급진파]] 소속 인물 존 C. 프리몬트는 노예제를 지지하지만 연방을 지지한 국경 지대 주인 [[미주리 주]]의 세인트루이스 시에서 미주리주의 계엄령을 발동하면서 "남부연합군 소속 인물들의 노예들을 포함한 재산을 몰수하고, 몰수된 노예들은 해방될 것이며, 연방정부를 반대한 이력이 있는 남부연합군 소속 인물은 사형당할 수 있다"고 선언했는데, 링컨은 프리몬트의 선언문이 너무 극단적이며, 자칫하면 연방을 지지한 노예제 지지 주들이 분리 독립해서 [[남부연합]]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해서 프리몬트에게 선언문을 "노예해방선언 조항을 기존 연방법인 '남부연합군 소속으로 직접 전쟁에 참전한 노예들만 몰수하고 해방하는 것'에 부합하도록 수정하라"고 명령했으며, 프리몬트가 월권행위를 한다고 판단해서 이후 해임했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연설을 가져와서 링컨이 노예제에 관심이 없었고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고 주장한다. >저는 백인종과 흑인종 사이에 어떤 식으로든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평등을 가져오는 것에 찬성하지 않으며, 찬성한 적도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저는 흑인종(Negroes)을 투표인이나 배심원으로 만드는 것, 정권을 쥐게 하는 것, 백인들과 결혼하게 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고 찬성한 적도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저는 흑인과 백인종 사이엔 물리적인 차이점이 있으며 그 차이점이 영원히 두 인종이 사회적, 정치적 동등관계로 살아가는 것을 방지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럴 수 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할때 그들이 평등하게 살 수 없는 한, 그들과 함께 살고 있는 동안 우월한 지위와 열등한 지위가 남아있어야 하며, 다른 그 누구와 마찬가지로 저 역시 '''백인종에게 우월한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는 데 찬성'''합니다. >---- >1858년 9월 일리노이 주 남부(찰스턴)에서 [[http://www.nps.gov/liho/historyculture/debate4.htm|영어전문]]. 다만 이 문장은 주의할 것이, 그 뒤 계속되는 [[문맥을 무시한 인용|링컨의 연설을 '''짤라먹었다''']]. 링컨은 바로 뒤에 이렇게 말했다. >...백인종에게 우월한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는 데 찬성'합니다. 그러나 이 기회를 빌려 다시 이야기하건대 저는 개인적으로 '''백인종에게 우월한 지위를 부여한다고 해서 흑인종이 모든 권리를 부정당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흑인 여인이 노예가 되는 걸 원치 않는다고 해서 제가 그 흑인 여성분과 결혼하고 싶은 건 아니거든요. (환호와 웃음소리) 사실 이 문장도 그냥 보면 좀 의아할 수 있는데, 당시 링컨의 사상이 어떻게 변화해왔고 그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었는지 좀 더 이해하면 청중들이 왜 웃었는지도 알게 된다. 이때 토론 상대방인 [[스티븐 A. 더글러스]]는 링컨의 개인적인 취향이 '''흑인 매니아'''로, 그는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주려고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흑인 소녀를 아내로 삼고 싶어한다는 흑색선전으로 링컨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에 링컨은 노예제는 반대하되, 흑인들이 투표권처럼 백인들과 완전히 동등한 권리를 당장 얻어야 한다는 입장은 아니라고 에둘러 반박했다.[* 당시에는 백인 여성들도 투표권이 없던 시대였다.] [* 사실 미국 사회운동사에서 인종차별, 노예제에 반대한 양심있는 백인들에게 'nigger-lover'란 낙인을 찍고 침묵시키려는 집요한 꼬리표의 역사를 알지 모른다면 왜 앞뒤 문맥 짜르고 악마의 편집을 가하면 영락없는 인종차별적 발언이 인종차별 반대 연설로 봐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당장 위에 "흑인여성이 노예가 되는건 반대하지만 그 여성과 결혼하겠다는건 아니다"란 발언도 단순한 위트가 아니라 "나 흑인성애자 아니다"란 정치적 완곡발언으로 봐야한다. 왜냐하면 당시 노예제 유지 찬성 진영이 주구장창 하는 소리가 "노예해방론자들을 흑인들과 섹스하고 싶어서 해방시키려는거다!"란 음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흑인들과 섹스, 그것도 합의간 섹스도 아니라 강간하고 다니던건 백인 노예주들이란 점을 생각하면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지만 "인종평등을 지지하는 백인은 사실 해당 인종성애자 (그것도 사실 당시 사회 분위기를 생각하면 '''수간쟁이'''란 뉘앙스까지 풍긴다)라서 그런거다!"란 꼬리표는 미국 인종간 갈등의 역사에서 뿌리깊은 흑색선전이었다.] 남북전쟁에서 연방군을 도운 흑인들을 보고 노예제와 흑인선거권에 대해서 마음을 고친 많은 백인들처럼, 링컨도 (본심이 뭐였든 간에) 처음에는 '''흑인들이 하등하다고는 하나 그것이 노예가 되어야 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백인이든 흑인이든 미국 독립선언문 정신에 따라서 신체의 자유, 행복을 추구할 권리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번 것을 남들에게 이유없이 빼앗기지 않을 권리가 있다'''라는 사상에서 출발해서 전쟁 말기 쯤 되면 '''보상없고 즉각적인 노예해방 그리고 나라에 의무를 다한 흑인들에게 선거권'''이라는 급진주의자로 변하는 것. 그리고 청중들이 웃은 이유는 당시 노예 찬성론자들인 남부 지주들이 여성 흑인 노예들을 성노리개로 삼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였는데, 링컨이 자신이 흑인애호가라는 비난을 위트있게 부정하면서 정작 이런 흑색전선을 펴고 있는 민주당이 흑인 정부(情婦)를 두고 있는 남부 지주들의 지지를 받는 상황을 꼬집은 것이다.[* 참고로 상대방인 더글러스 역시 자유주의 사상이 강한 북부 민주당 출신으로, 노예제를 찬성하는 남부주들을 방임하는 경향은 있었지만(허나 남부 민주당 인사들은 이런 더글러스조차 배신자라며 깠다), 이들 역시 노예제를 열렬히 옹호하는 측은 아니였다.] 한편, 링컨은 이런 말도 했다. > 연방을 지키기 위해 노예제가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겠다. > 연방을 지키기 위해 노예제를 폐지해야 한다면 그렇게 하겠다. > 연방을 지키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이 다 필요하다면 그 역시 그렇게 하겠다. 다만 이 글만 보면 노예제 폐지보단 연방제를 더 중시한 것 아니냐고 볼 수도 있는 내용인데, 사실 링컨은 그 와중에도 노예제 폐지라는 자신의 개인적인 소신은 변치 않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원문은 이렇다. > '''이 싸움에서 내가 견지하는 최대의 목표는 바로 연방을 지키는 것이며 __노예제를 지키거나 파괴하는 것은 아닙니다.__''' '''만약 그 어떤 노예도 해방시키지 않고 연방을 지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고''', 모든 노예를 해방시킴으로써 연방을 지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며, 일부는 해방시키고 일부는 내버려둠으로써 연방을 지킬 수 있다면 역시 그렇게 할 것입니다. 내가 노예제나 유색인에 대해 취하는 행동은 그것이 이 연방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며, 내가 삼가는 행동은 그것이 연방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중략) 나는 여기서 내 공적 직무에 대한 내 견해에 따라 내 목적을 언급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은 어디서나 자유로울 수 있다는, 내가 자주 표명했던 개인적인 바람을 수정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 >[*영어전문 [[파일:external/memory.loc.gov/001.jpg|width=200]] ] 참고로 링컨이 이 말을 한 배경은 '왜 일을 급진적으로 진행시키지 않느냐'는 노예 해방론자들에 대한 답변이었다. 위의 말은 1862년 7월(그러니까 남북전쟁 도중) 통과된 [[http://en.wikipedia.org/wiki/Second_Confiscation_Act|2차 몰수법(Second Confiscation Act)]]이 제대로 집행되고 있지 않고, 링컨이 여기에 대해서 태만한 태도를 보여 지지자를 실망시키고 있다고 쓴 [[호러스 그릴리]](Horace Greeley, 당시 뉴욕『트리뷴(Tribune)』 주필)의 편지에 대한 [[http://www.abrahamlincolnonline.org/lincoln/speeches/greeley.htm|링컨의 답장]]에서 나온 것이다.[* 그릴리의 편지를 더 살펴보자면 그릴리는 "우리의 철천지원수들에게 반역하여 평생의 압제자들로부터 탈주해온 이들이 자유와 보호를 원하여 우리에게 왔는데 그들이 맞닥뜨린 것은 적의와 감금, 그리고 살해였다고 말한다.", "우리가 남부 흑인들이 우릴 위해 싸울 수 있도록 허락하든 하지 않든 간에, 정찰병·길 안내인·첩자·요리사·마부·도랑파는 인부·벌목꾼 등의 흑인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붙여 몰수법을 제대로 집행해 달라고 말한다."고 링컨에게 전하고 있다.] 전문에서 링컨은 "누군가가 노예제만 폐지된다면 연방이 분열되어도 상관없다 한다면 난 동의하지 않겠다, 누군가가 노예제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연방이 분열되든 말든 상관없다 한다면 그 역시 반대한다"라고 밝히며 개인으로서의 링컨이 아닌 대통령으로서의 공직자 링컨은 연방을 지키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둘 것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명한다. 링컨 개인은 만인의 평등이란 가치를 신봉하였지만 그 가치를 위해 나라가 분열되는 꼴을 내버려둔다면 대통령으로서 옳은 처신이 아니고 또다른 혼란만 초래할 것이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렇게 해명한 것이다. 링컨은 특히 전쟁 초기에는 매우 조심스러운 입장을 비추었다. 왜냐하면 실제 남부가 떨어져 나가던 시기에도 끝까지 연방에 남길 고수하던 [[미주리]], [[켄터키]], [[델라웨어 주|델라웨어]], [[메릴랜드]] 등 노예제 주들은 적지 않게 있었는데, 만약 링컨이 노골적으로 노예제에 반대 표시를 했다면 이들은 최악의 경우 연방에서 탈퇴했을 것이고,[* 실제 남북전쟁 발발과 함께 이들 지역에서도 초기엔 분리주의 움직임이 일었다. 연방군이 초기 진압해서 위기는 모면했지만..] 그럼 어쩌면 남북전쟁의 흐름이 바뀌었을지도 모를 노릇이기 때문. 즉, 그는 사회운동가마냥 본인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살긴 어려운 현실적 상황이 있었다. 그리고 시대적 한계를 고려하지 않은 급진적인 개혁은 아무리 그 시대에 필요했던 해결책이라 할지라도 반대파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해 좌절된 케이스 역시 많았다. 한편, 정치에 갓 입문한 초짜 시절의 링컨은 어떻게 보면 그의 정적 더글러스보다 더한 인종차별로 보일 수 있는 발언을 하기도 했는데, 바로 노예제를 폐지하고 [[흑인]] 노예를 [[아프리카]]로 되돌려 보내자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당시에는 비교적 널리 동조를 받았으며, 국가의 주도로 전면적으로 실시되지는 않았지만 민간 차원에서는 실행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그 결과 [[라이베리아]]가 건국되었다. 의외겠지만 이런 주장에는 백인 우월주의자와 흑인 양쪽 모두 동감을 샀는데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흑인들이 아프리카로 가버리면 흑인들 안 봐도 되어서 좋다고 동감했고 흑인들은 아프리카로 가면 지긋지긋한 백인 얼굴 안 봐서 좋을 거라고 여겨서 동감했다.] 그러나 링컨 연구자들 중 상당수는 링컨의 이 주장이 인종차별적이라고 하기보다는 당시 현실을 고려한 결과라고 본다. 흑인 노예들이 해방되고 난 뒤에도 미국 사회의 편견과 차별사상 때문에 제대로 진입을 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한 결과라는 뜻이다. 당시엔 [[아파르트헤이트|흑인, 백인 서로 구역 나눠살면]] 서로 싸울 일도 없고 좋다고 생각한 미국인들도 상당했다고 한다. 링컨은 전쟁 초반, 노예 해방의 급진적 진행에 대해 다소 유보적인 입장을 취한다. 일례로 헨리 할렉(Henry Halleck) 장군은 노예들이 드나들며 적에게 군사정보를 보내고 있다고 믿고서는 1861년 11월 전선에서 모든 탈주 노예(contraband)의 부대 입대를 금지시키고 추방하는 명령을 내렸는데, 링컨은 어떤 항의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거기다 남부와 마찬가지로 북부 역시 붙잡힌 노예들이나 연방세력으로 돌아선 탈주 노예들이 자유인이 되긴 커녕 수용소에 갇혀 많은 숫자가 죽었다. [[존 C. 프리몬트]][* 1856년 대통령선거(그러니까 링컨이 당선된 선거 바로 전의 선거)에서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다.] 장군이 1861년 7월, 미주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연방에 반대한 그 주의 노예 소유주들의 모든 노예들은 자유라고 발표했을 때와 1862년 5월에 데이비드 헌터 장군이 조지아, 플로리다 및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모든 노예는 자유라고 선언하는 명령을 발했을 때도 링컨은 즉각 무효화시켰다고 한다. 이는 두번 다 전쟁 초기에 일어난 일인데 링컨은 이에 대해 노예해방에 대한 성급한 시도는 경계주의 상실을 의미하며, 켄터키 주를 잃는 것은 전체 전투에서 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전쟁 초기 양상이니 경계주와 북부 민주당원들의 남부 전향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같은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두번의 장군령 모두 해방론자들 사이에서 나름의 지지를 얻긴 했지만, 현실적 난관도 많았기에 링컨으로선 이를 취소시킬 수밖에 없었다. 우선 프리몬트 장군의 경우 상관인 링컨 대통령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독단적으로 미주리주에 계엄령을 선포했는데 그 내용이 '''엄청난 파급효과를 불러왔다'''. 북 경계주인 미주리 지역에서 활발한 테러 활동을 벌이던 남부 게릴라들을 견제하기 위해 북군이 장악한 지역에서 "총을 소지한 민간인은 군법재판을 통해 처형될 수 있다"는 계엄령을 발표한 것인데 이 조치에 대한 보복으로 남군은 북부 지지자들을 처형했고 미주리 주 주변에선 그야말로 대학살이 벌어졌다. 그리고 프리몬트의 남부 지지자 소유인 노예는 모두 해방된다는 선포는 미주리와 켄터키, 그리고 북부를 지지하지만 노예해방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상당수를 남부 지지자로 만들었고 오히려 더 큰 테러를 불러왔다. 경계주의 이탈, 그중에서도 특히 켄터키의 남부화가 연방의 확실한 분열과 패전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던 북군으로선 '''가장 두려워하던 상황이 초래'''된 것. 링컨이 그 조치를 취소시킬 것을 건의하지만 프리몬트가 듣지 않고 오히려 아내를 보내 링컨을 상대로 협상을 제시하자 링컨은 자신이 나서서 계엄령을 해제하고 문제를 일으킨 프리몬트를 2개월 후 해임시킨 뒤 율리시스 그랜트를 임명하는 결정을 내렸다.[* 물론 이 노예해방령은 명분 확보 측면에선 북부에 좋은 효과를 불러오긴 했다. 애초 남북전쟁의 표면적 대립은 노예제를 두고 수십 년간 이어져온 논쟁에서 비롯된 만큼 이 노예해방 선언은 북부군의 사기 입장에서도 매력적인 카드였다. 실제로 북군의 일개 병사가 "우리는 우리 선조와 달리 좀 더 숭고한 임무를 가지고 있다. 선조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위해 싸웠지만 우리는 다른 인종의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것도 북부에 한정된 얘기였고, 남부나 간보던 다른 주에선 긴가민가한 상황이긴 했다.] 또 한 명의 장군인 데이비드 헌터는 군사적 능력을 포함한 여러 방면에서 프리몬트보다 유능했고, 경험도 많았으며 충성심 등에 있어 링컨이 의심할 여지가 없었을 인물이란 것이 역사학자들의 평이다. 헌터 장군령의 궁극적인 의의는 그릴리가 편지에서 요구한 것과 마찬가지로 흑인 병사들의 자유 참전이었다. 그러나 헌터의 장군령은 당시에도 말이 많았는데 우선 탈주 노예들 중 자신의 자유의지로 참전하는 용병들은 극소수에 가까웠고, 백인 부대원들이 아무 설명도 없이 일하고 있는 노예들을 납치하듯 강제로 끌고 가서 입대시킨다던가 하는 경우도 있어서 흑인들 사이에서도 괴담이 돌곤 하였다. 프레몬트 때와 달리 링컨은 헌터 장군에 대해 자신의 친구이자 정직한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조치를 취소시켰고 이후 1주일 뒤 흑인 병사들을 모집하는 것 자체는 당연히 찬성이지만 강압적으로 참전을 강요하거나, 전쟁에 적합하지 않은 흑인들까지 강제 동원시키는 것을 반대할 뿐이라고 입장을 표명했다. 당시 의회에는 흑인 병사 참전을 찬성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반대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는데 반대 여론은 역시나 전쟁 초기 링컨이 가장 신경쓰고 있었던 켄터키 주를 앞세운 경계주의 의원들이었다. 헌터의 장군령이 무산으로 돌아간 이후 의회에서는 대안으로 1,2차 몰수법을 발의하는데 링컨은 이 법이 무조건적인 사권박탈법이라고 말하면서 법이 수정될 때까지 서명하는 것을 거절했으며, 거부권을 행사하지는 않았지만 그 법에 대한 자신의 불만을 표명하고 이를 수행하지 않았다.[* [[http://www.ihr.org/jhr/v13/v13n5p-4_Morgan.html|출처]],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0812&docId=59383743&qb=MuywqCDrqrDsiJjrspU=&enc=utf8§ion=kin&rank=4&search_sort=0&spq=0|일부 한역(오역주의)]].] 이에 대해 링컨은 의회 권력으로 이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전쟁 사령관 직권으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보았고 노예 해방 선언을 준비하게 된다. 어쨌거나 링컨은 자신의 생애 내내 노예제를 반대해왔으며 노예제를 '''미국의 암덩어리'''로 여겼다. 그의 행보를 보면 알겠지만 링컨은 급진적인 혁명가라기보다는 점진적인 노예제 폐지론자에 가까웠다. 당장 해결하기에는 어렵지만 연방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사라져야할 악습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릴리와의 편지 답장에 대해서 오랫동안 여러가지 해석이 있어왔으나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 역사학자들은 이것이 링컨이 노예제를 정치적으로만 이용했다거나, 노예제에 대해 반대하는 인물은 아니었다는 것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으며 링컨이 노예제를 철저하게 연방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만으로 생각했다는 의견에도 반박하고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의 경우 그의 발언이 오히려 북부의 백인 지상주의자들에게 노예제 철폐가 아닌 "연방의 유지"라는 명분을 제공하여 그들을 회유하려는 수단이었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역사학자 스티븐 오츠의 경우 링컨이 전쟁 초반 경계주들의 이탈과 북부 민주당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했던 발언들만이 선택적으로 인용되어, 링컨이 했던 노예제 반대에 대한 다른 수많은 발언들과 당시의 정치, 군사적 맥락이 철저히 무시당하고 그릴리의 답장에 대한 해석이 왜곡되고 있다고 자신의 저서에서 지적했다. > '''노예제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서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나는 대통령이라는 나의 직책이 이러한 의견에 대해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이전까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고백하건대 그동안 내가 결과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결과가 나를 지배했었던 거 같다. 링컨 본인도 대통령이라는 자신의 직책과 정치인으로서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던 상황 등에 대한 나름의 회한이 존재했던 것 같다. 물론 [[만악의 근원]]은 노예제를 당연시하던 당시 상당수 지역의 사회 분위기였겠지만. 또한 초반에 급진적인 법안이 중립 입장을 취하고 있는 주들을 자극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몸을 사리긴 했어도 링컨은 꾸준히 자신이 직접 제정할 노예 해방선언을 위한 준비를 성실하게 해나가고 있었다. 링컨은 반대의사를 표명했다고 알려진 몰수법에 대해서도 의회의 권력만으론 시행시킬 수 없을 것이란 생각에 자신의 직권으로 그것을 가능케하고자 계획을 세워나가고 있었다. 실제로 2차 몰수법이 발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노예 해방선언의 초안을 내각에 발표했고[* 링컨의 내각 내부에서조차 반대가 어마어마했다. 특히 부통령인 햄린부터가 노예 해방선언이 시기상조라며 태클을 걸고 나섰다. 햄린은 노예제 폐지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노예 해방 선언은 전쟁이 완전히 끝나고 남부의 처분이 끝났을 때 해야 반발이 적을 것이라고 반대했다. 링컨을 지지하는 내각 인사는 샐먼 체이스 재무장관 등 몇 안 됐다. 상원의장을 겸하는 부통령인 햄린이 이 내용을 의회에 알리는 바람에 의회에서도 식겁해서 "노예 해방선언을 빨리 하면 유럽 외교에 악영향을 받는다며" 링컨을 말렸다고…] 이듬해에 마침내 노예 해방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남북전쟁이라는 상황과 여러 가지 정치적 상황에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도 과감하게 노예 해방을 발표한 것, 수정헌법 13조를 통과시켜 노예제를 완전히 폐지한 것은 그 기저에 깔린 정치적 배경을 감안하더라도 링컨의 큰 '''업적'''이다. 전쟁이 끝났으니 노예 해방합시다! 그럽시다! 와! 이런 분위기가 결코 아니었다. 노예는 여전히 남부의 '''자산'''이었고 노예해방은 자산 강탈로 비추어졌다. 북부에서도 서민층은 자기보다 밑인 흑인노예와 동급이 되는 것을 그닥 달가워하진 않았고, 이를 반영한 여당과 야당 모두 노예해방에 조심스럽거나 적대적이었다. 링컨의 해방선언은 향후 미국의 역사가 [[인종차별]]의 철폐로 이어지도록 방향을 결정하였다. 즉, '''노예제 폐지와 인권 향상에 링컨은 큰 공적을 세운 것'''이며, 링컨의 소신이 옳았음은 그의 정치기반 [[일리노이]]에서 탄생한 '''[[버락 오바마|흑인 미국 대통령]]'''이 다시 한 번 증명해 주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